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1세 (문단 편집) === 영국의 국왕 === [[1714년]] [[6월 8일]] 앤 여왕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법에 따라 [[영국 국왕]]으로 추대되어 54세의 나이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앤 여왕은 자녀가 있었으나 거의 모두 사산되거나 유산되었다. 살아남은 아들 윌리엄도 1700년 11세의 나이에 죽었다. 유산아나 사산아까지 합치면 무려 '''17명'''. 앤 여왕과 조지 1세는 6촌 지간이며 조지 1세의 [[외할머니]]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제임스 1세]]의 딸이다.] 사실 조지 1세는 왕위 계승 서열이 50위가 넘어가는 먼 친척이었으나, 그보다 계승 서열이 앞서는 이는 모두 다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 [[명예혁명]]의 명분 자체가 가톨릭 국왕 축출이았던 만큼, 지금까지도 영국사에서 가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권은 원천 봉쇄되어있고, 총리도 불가능하다. 사실 총리 부분은 명백하게 종교 차별이지만, 오늘날에는 종교가 영국의 정치 이슈가 아니라서 이 문제가 방치되고 있다.] 반면 개신교의 경우는 칼뱅주의자이든 루터주의자이든 왕위 계승이 가능하기에[* 이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태생 자체가 당대의 수많은 신학 노선을 국가권력으로 한 지붕에 동거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회 39개 신조]]의 경우 칼뱅주의 색채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교황을 배제하고 국왕에 의해 서임된 주교들이 이끄는 국교회 체제 그 자체'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야말로 국교회 신자의 기준이었고, 그래서 1. 국교회 2. 비국교회 프로테스탄트 3. 가톨릭이라는 잉글랜드의 종교지형이 나온 것이다.] 루터교도였던 조지 1세나 칼뱅파였던 윌리엄 3세도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영국에 머물 때는 왕을 위해 독일인 루터교 목사가 따라왔다. 아들 [[조지 2세]]도 성년이 될 때까지 독일 하노버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루터교도였다. 영국의 국왕임에도 조지 1세는 [[영어]]에는 서툴렀지만 모국어인 [[독일어]] 이외에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다. 당시에 프랑스어는 유럽 상류층의 공용어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조지 1세는 주로 프랑스어를 이용해서 영국인 장관들과 소통했다. 그러나 조지 1세는 영국의 국내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토리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휘그당과 [[로버트 월폴]] 등의 정치가에게 영국의 정치를 맡겼다. 애초에 영국에 머물렀던 시기가 별로 길지 않았고, 영국보다 고향인 하노버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조지 1세는 유럽 대륙에서의 하노버의 이권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대북방전쟁]]에서 반 [[스웨덴 제국|스웨덴]] 측에 참가하여 스웨덴으로부터 [[브레멘]] 등을 할양받아 하노버 선제후국은 [[북해]]로의 출구를 확보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